사촌 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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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출처: http://www.khj0606.com/ 



한여름의 태양은 뜨거웠다. 청록빛 잎사귀를 등에 지고있는 나무들과 초록잔디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 여름이 시작될때쯤 세워 둔 대형 파라솔 아래에서 우리는 그 한낮의 더운 열기를 겨우 견뎌내고 있었다. 그는 파라솔이 가져다준 안락한 그늘아래서 살며시 두눈을 감은채 긴의자에 편안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나는 유서깊은 가문 옥스퍼드가의 장녀답게 섬세한 하얀 레이스에 비단 수술이 달린 숙녀용 양산을 들고 허리를 꽂꽂하게 편채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파라솔에서 한발자욱만 벗어나면 찜통이 따로없었고 나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연신 닦아내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선 나의 여동생 쎄실과 남동생 헨리가 한창 테니스를 치고있었다. 쎄실은 제정신이 아닌게 분명하다. 이 더운날 테니스를 하다니 그러다 주근깨라도 생기면 밤새 울고불고 할테지..

나는 슬쩍 그를 훔쳐보았다. 그는 시원한 흰색 면소재의 체크무늬 반바지에 짙은 베이지색 반소매 상의를 입고 그속에 몸에 찰싹 달라붙는 옷을 입고있었는데 그옷에는 무시무시한 그림들이 있었다. 멀리서보면 마치 몸에 문신을 새긴것처럼 보였다. 처음 볼때는 깜짝 놀랐었는데 며칠 보았더니 이내 익숙해졌지만 그래도 옷에 그려진 그림들은 여전히 무서웠다. 그는 그 강렬한 느낌의 의상이 지금 런던에서 최신유행중 이라고 내게 말했다. 옆에는 이곳에 도착한후 내내 쓰고 다니던 검은 테두리가 둘러있는 하얀색 페도라가 잔디위에 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는 나의 사촌 현중이다. 

내가 그를 처음 본건 삼일전이고 그의 존재를 알게된건 불과 5일전이다. 그러니까 닷새전 청명한 아침, 정원에 있는 나무사이로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올때 쯤 옥스퍼드가의 안주인이신 내 어머니와 쎄실, 헨리, 나 셀린느, 그리고 가정교사 에밀리 커스티양은 아침 식사를 위해 식당에 모였다. 어머니는 매일 그랬던거처럼 아침식사전 인도에 계신 내아버지의 무사안위를 위해 기도를 하셨고 조식을 끝낸후 주방하녀가 가져다준 우편물을 살피셨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께서 
"어머! 세상에!!" 하고 작은 목소리지만 평소보다 충분히 큰소리로 외치셨다. 왠만한일로 절대 목소리를 높임이 없는 어머니셨기에 우리는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머니! 무슨일이 생겼나요?!!!" 난 걱정스런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내 목소리에 나를 쳐다보는 어머니 얼굴은 무언가에 정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자식들의 쏟아지는 눈길이 느껴졌는지 이내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우리에게 놀랄만한 소식을 전해주셨다.
"아니..셀린느. 나쁜소식이 아니구...기쁜소식이야. 이틀후에 너희들의 사촌이 우리를 방문하겠 다는구나!"
"사촌이요?!!" 나를 비롯한 우리 삼남매들은 모두 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19년을 살았지만 우리에게 사촌이 있다는 얘기는 처음듣는 소리였다.
"우리에게 사촌이 있었나요, 어머니?!!" 나의 질문에 그녀는
"음..그래 사실 나도 잊고있었지만 너희 아버지의 하나밖에 없던 여동생, 베스. 베스의 아들이 내일모레 이곳에 도착한다는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내아버지의 여동생이라면 내겐 고모인데....베스고모....그래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젊은 동양인 장사치와 눈이 맞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 야밤도주를 했고 그후 얼마뒤에 산고로 돌아가셨다는 베스고모님..
"알아요. 어머니. 베스고모님은.." 내가 베스고모에 대해 말하려하자 어머니는 눈을 찡긋하시며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내셨다. 사실 옥스퍼드가에서 베스고모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내가 아는건 베스고모님이 이근방 어느집안 아가씨보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고 그런 그녀를 집안사람 모두 아끼고 사랑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하필 동양인 장사치와 그런일이 있어서 사랑하는 여동생이 떠난후 내아버지가 무척이나 가슴아파 했다는 어릴때 주방하녀들이 쑥덕거리며 나누던 이야기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셀린느, 쎄실, 헨리" 어머니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에는 다정함과 엄격함이 함께 섞여있었다.
"내일모레 오후에는 우리집에 손님이 오신단다. 좀전에 말했지만 그는 너희들의 사촌이야. 멀리 런던에서 일부러 우리를 찾아와주는 손님이니까 우리집에 머무르는 동안에는 조금도 불편함이 없게 예의 바르고 다정하게 친절하게 대해주어라. 알겠지~~ 너희들이 잘할꺼라고 믿는단다." 
"네. 어머니!" 
"그리고 에밀리 커스티양, 낯선곳에 방문하는 우리 사촌에게도 우리 아이들을 대하는만큼 관심과 애정을 베풀어주길 바랄게요" 
"네. 잘알겠습니다. 옥스퍼드부인" 어머니는 커스티선생님 에게도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
"음..그리고..얘들아..혹 그를 만나면 말이다..." 어머니는 주저하시면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우리와 조금 다를지도 모른단다..그러니가 무슨 얘기냐면....베스는 영국인이 아닌 동양인과 결혼했단다..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우리와 조금 다를지몰라. 혹 그렇다해도 절대 그앞에서 놀라거나 표를 내서는 안돼..그런 행동은 정말 비신사적인 행동이란다" 호기심천국 인생을 살고있는 여동생 쎄실이 가만 있을리 없다. 쎄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 동양인과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뭐가 다른건데요?!"

창문을 통해 정원에서 실려오는 여름밤 공기는 매번 날 취하게 만들었다. 이때쯤이면 난 매일밤 침대에 누워 밤향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신채 두~웅 뜬, 마치 내가 가벼운 깃털이 되어 바람에 밀려 우리집 정원을 떠다니는것 같은 미묘한 느낌을 누리곤 했는데, 사실 이것은 나만의 비밀 이었고 이시간만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사방이 또렷한 머리로 우리의 새로운 사촌에 대한 생각으로 꽉차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일까...나이는 몇일까..아마 나보다 동생일테지..그는 왜 갑자기 이곳에 방문하는걸까...사촌이 있다는건 어떤걸까...
그때 내방문이 빼꼼히 열리면서 쎄실이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갈색머리칼에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나와 똑같은 미색잠옷을 입고있었다. 그리고 내 침대에 천천히 올라오면서 말했다.
"셀린느 언니, 잠이 안와.." 
침대위에 무릎을 끓은채 그녀는 누워있는 날 내려다보았다.
"셀린느 언니, 동양인을 본적이 있어?" 그녀가 물었다.
"아니..실제로 본적은 없고 책에서 봤어"
"어떻게! 어떻게 생겼어?" 그녀는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글쎄..내가 본 그림에선 얼굴, 머리칼 모두 시커멨어. 눈은 쪽찢어져있었지. 또 다른책에 써있기로 몸에 시커먼 털이 북실북실하고 이는 산짐승처럼 누렇다고도 하고. 근데 키는 다큰 어른들도 어린애처럼 작다고해. 대신 힘은 엄청 쎄서 산짐승도 맨손으로 때려잡는다고 하던데."
"아!..무서워..셀린느, 괴물같아.." 그녀는 두려움에 떨며 내옆에 바짝 누워 내가슴속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그 큰 파란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셀린느..나 무서워..그가 우릴 헤치지 않을까.." 그녀는 정말 겁에 질려있었다. 난 그녀의 갑작스런 반응에  당황했다.
"아니야..쎄실..그는 우릴 헤치지도 않아. 그는 우리 사촌이잖아. 그리고 괴물처럼 생기지도 않았을꺼야. 왜냐면 그는 혼혈이니까. 그의 어머니는 베스고모님 이잖아..너는 기억할지 모르지만 난 예전에 그녀의 사진을 본적이 있는데 그녀는 우리처럼 하얀 피부에 파란 눈동자 그리고 우리가 갖지못한 풍성한 금발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였어..어쩌면 그도 엄마를 닮아서 베스고모님처럼 금발머리일지도 몰라." 난 일부러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사실은 나도 은근 그가 두려웠다. 
"셀린느 언니..나 오늘 언니랑 함께 자고가면 안될까.. 너무 무서워.."
"안돼. 어머니한테 혼날꺼야"
"하루만..오늘밤만..혼자 자기엔 너무 무서운걸" 
난 쎄실에게 괜한 소릴 했다는 후회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슴에 찰싹 달라붙어있는 어린 내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인도에 계신 아버지가 생각났다. 대영제국의 부름으로 인도에 가신지 벌써 4년, 작년 한달간 집에 머무르신것을 빼곤 벌써 4년간 집을 떠나계셨다. 그후로 어린 헨리와 늙은 집사 윈스턴을 빼고 옥스퍼드가에는 남자가 없었다. 난 이미 열아홉살이고 아버지의 부재에 태연할수 있었지만 어린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불안" 이었다. 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래..오늘밤은 자고가. 대신에 오늘 하루만이야" 
"응..그래. 오늘만 자고갈게. 고마워 셀린느" 쎄실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웃었다.
난 그녀에게 내 왼쪽 팔배개를 내어주고 그녀의 헝클어진 긴 갈색머리칼을 귀뒤로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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